한지의 역사
우리나라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600년경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1000년 정도 이전, 낙랑의 옛 묘에서 물로 뭉쳐진 닥종이와 같은 물질이 발견됨으로써 그 이전부터 우리나라 특유의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2세기에 중국으로부터 종이의 명칭과 만드는 방법이 전해졌다고 하는 설은 한지의 주원료인 ‘저(楮,닥나무)’의 훈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저’의 음이 닥으로 읽혀지던 시기에 종이가 우리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에 닥나무 ․ 닥종이 등의 용어를 통해 그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4세기 말 동진의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파하면서 경전들과 함께 종이 만드는 기술도 함께 전해졌을 것이라는 설, 751년 불국사를 창건할 당시 석가탑에 넣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나 610년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채색, 종이, 먹, 연자방아 등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에 따라 종이 만드는 기술이 존재하였고 전수 및 토착시켰다는 6~7세기 설 등이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지지만 우리 고유의 종이 만드는 기술이 발생한 시기는 바로 삼국시대입니다.
삼국시대는 한지가 처음 태어난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이 시기 이전에 종이와 만드는 기술이 전래되었을 뿐 만 아니라 상당 기간 중국 종이를 모방하여 제작하였지만 삼국시대에 이르러 우리나라 고유의 닥종이 제조 방법을 만들어 발달시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종이 만드는 기술에 관하여 알 수 있는 문헌 자료나 유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중국의 옛 문헌에서 닥나무 껍질을 두드려서 만든 하얗고 반질반질한 종이라는 뜻으로 백추지(白硾紙), 또는 계림지(鷄林紙)라 불리었던 신라 종이를 ‘천하에 비할 수 없는 좋은 종이’라 언급한 것으로 보아 당시 한지의 우수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일본 호류사의 금당벽화를 그린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일본에 종이 만드는 기술을 전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이처럼 7~8세기경은 우리나라에서 고유의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널리 발전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는 닥나무로 만든 종이가 우리의 종이로 정착된 시기로, 삼국 시대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경을 만들기 위한 종이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제지술이 더욱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나온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6호, 불교중앙박물관 소장)은 닥나무를 원료로 한 두루마리로 천년을 넘어 현존하고 있으며, 닥종이를 자주색으로 염색하여 표지를 만든 경덕왕 14년(755년) 때의 문서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국보 제196호,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등 8세기 중엽부터 이미 우리나라 고유의 제지술을 이용한 닥종이 생산이 활발하였음을 여러 유물과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는 한지가 더욱 발전한 시기로서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종이의 제조와 출판이 왕성하게 이루어져 한지를 만드는 기술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또한 불교가 성행한 당시 사회적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나라에서 종이 만드는 일을 장려하였습니다. 당시 만들어진 불경의 수만 보아도 종이의 쓰임이 많았을 것입니다. 이에 전국에 닥나무를 심어 가꾸고 지리적 조건이 좋은 지방에 종이를 만드는 지소(紙所)를 설치하여 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원료를 사용하여 각 지방에 맞는 특색 있는 종이를 만들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제지술은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초기부터 나라에서 필요한 종이를 안정적으로 생산ㆍ활용하기 위해 국영 조지소(造紙所)를 설치하여 종이의 생산을 독려하였습니다. 또 각 지방에는 장인(지장,紙匠)을 소집하여 나라에서 필요한 종이를 생산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왕들은 이 조지소(造紙所)를 통하여 종이의 확보는 물론 원료 조달, 종이 규격화, 품질 개량을 도모하여 고려 시대로부터 이어진 제지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조선 후기에는 두 차례의 전쟁을 겪으며 국가의 조지서(造紙署, 태종 때 설립하였으며 세조 때 조지소에서 조지서로 개칭) 건물이 파괴되었고 한지를 만드는 장인을 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폭발하는 수요에 비해 원료가 부족하자 짚, 보리, 갈대 등의 부원료를 혼합함으로써 품질이 저하되었고 명ㆍ청대로 이어지는 혹독한 조공 압박 등으로 제지 기술이 서서히 쇠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시대 말엽에 들어서면서 한지 제조 산업이 쇠퇴하면서 고종 21년(1884년)에는 일본을 통해 서양식 기계로 제조한 종이가 수입되었습니다. 1901년 서울 용산에 최초로 양지 생산 공장인 전원국조소가 설립된 이후 대중들에게 양지의 보급이 확산되면서 한지의 사용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에 고종은 한지의 부흥을 위해 닥나무 재배를 장려하고 협동조합을 조직하는 등 한지의 기술 개량과 생산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후에는 1912년에 개소한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를 중심으로 한지 생산을 장려하고, 제조 기술을 표준화하였습니다. 전통적인 종이를 만드는 방법도 크게 변화하여 원료를 삶고 표백하는 과정에서 화학 약품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닥섬유를 두드려 만드는 고해 방식 대신 기계식 비터(beater)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양지에 비해 생산성과 질이 떨어져 한지 생산은 급격히 더욱더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정치ㆍ경제ㆍ사회적 혼란과 도시화에 따른 농•산촌 인구의 감소에 따른 닥나무의 재배의 급격한 감소 등으로 인해 한지의 생산 조건이 매우 약화되었고 필기도구의 변화, 인쇄 벽지의 사용, 유리 창문 등으로 인해 창호지를 비롯해 한지의 수요가 급격하게 낮아지면서 한지 제작의 맥이 거의 단절될 위기까지 내몰렸습니다. 하지만 최근 웰빙과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한지의 친환경적 특성과 과학적 우수성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분야에서 그 가능성을 확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