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의 활용
‘문인들의 서재에 꼭 있어야 할 네 가지 벗’을 아시나요? 그것은 바로 붓•먹•종이•벼루입니다. 서재에서 쓰이는 네 가지 도구를 문방사우(文房四友) 혹은 사우(四友)라고 하여 사람에 빗대어 표현하였다니 재미있지 않나요? 이처럼 한지는 서예나 그림을 그릴 때 빼놓을 수 없는 재료였습니다. 한지는 질감 표현이 뛰어나 작가의 순간적인 표현이나 움직임을 잘 반영하여 담아낼 수 있고, 뒷면에 염료를 칠하여 그것이 그림의 앞으로 은은하게 스며 나오게 하는 표현이 가능합니다. 또한 아주 적은 물기에도 촉촉하게 배어드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먹의 진하고 흐린 정도에 의해 엷게 또는 진하게, 또한 먹물의 번짐 등을 이용하여 다양한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위의 그림을 한번 같이 볼까요? 이 작품은 김문태 작가의 열정(Passion)이라는 작품입니다. 한지에 수묵 담채로 표현하였는데 아주 간단한 선으로 ‘열정’이라는 글씨를 아주 생명력 있게 잘 표현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형태를 선으로 그린 후 색을 칠하는 방법과는 다르게 간결하고 집약적으로 힘 있게 느껴지는 것, 붓의 속도와 변화 그리고 여백의 느낌이 강조되어 깊이 사색하게 되고 기교적이면서도 우아한 화풍을 느끼게 되는 것은 바로 위에 설명한 한지의 특성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한지에 붓을 사용해서 그리는 그림의 터치감은 선과 선이 어우러져 자연스러운 조형의 형태를 갖게 되며 적은 붓으로도 형태가 나타남은 물론이고 농담까지도 한 번에 표현됩니다. 이 작품에서도 그림의 아래쪽에서 먹의 색이 시작되면서 위로 갈수록 점차 색상이 옅어지는데 이와 같이 전체적으로 농담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먹의 번짐 또한 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기가 없는 붓을 문지르듯 그려서 먹이 묻은 부분과 묻지 않은 부분이 한 획에 함께 나타나 거친 효과를 내기 때문에 담백하면서도 다양한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림의 왼쪽 상단에 화려한 색채를 더해 경쾌한 느낌을 주어 제목 그대로, ‘열정’이 느껴지지 않나요?
한지는 자연과 함께 숨을 쉬는 자연의 재료입니다. 이와 같은 한지의 우수성은 우리의 전통 한옥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한옥을 지을 때 천장, 벽, 창문, 바닥에 한지를 사용하여 마무리하였는데 천장과 벽에는 도배지로 도배를 하여 불필요한 소리를 차단하고, 따뜻함을 유지하고, 습도를 조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창문 등 모든 입구에 바른 창호지는 따뜻함을 유지하고 및 열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바람이 잘 통하게 하는 등의 다양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창호지의 가장 큰 장점은 현대 문명 기술이 만들어 낸 어떤 종류의 창문 재료보다 실용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창호지는 눈에 안 보이는 무수한 구멍이 있어 방문에 발라두면 환기는 물론, 방안의 온도와 습도까지 자연적으로 조절됩니다. 또한 습기가 많으면 그것을 빨아들이고 공기가 건조하면 습기를 내뿜어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게 하여 창호지를 ‘살아 있는 종이’라고도 합니다. 창호지가 자연 현상에 이처럼 반응하는 성질은 바로 자연에서 얻은 재료, 즉 ‘닥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창에는 햇빛을 받아들이거나 바람이 잘 통하게 하기 위해 하나의 창호지를 바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창에 바르는 한지는 공기를 정화시키고 방 안과 밖의 압력의 차이에 따라 필요한 만큼의 환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살의 안쪽에서 창호 마감을 하였기 때문에 외부에서 바라보면 문살의 선적인 아름다움이나 문양이 그대로 드러나고, 안에서는 밖의 빛이 투과되면서 창의 무늬를 부각시켜 은은한 멋을 더하였습니다. 우리 옛 선조들은 창호지를 바른 후 풀을 탄 물을 뿌려 보풀을 가라앉히고 구멍을 막아 빳빳하게 마르도록 하여 들기름을 가볍게 발라 비에 젖어도 찢어지지 않게 하였습니다.
한지를 도배지로 사용할 경우 여러 겹을 발라 사용하였으며, 색에 있어서는 백색을 선호하였습니다. 색의 명도가 높으면 악한 기운으로부터 보호받고 복이 들어온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촛불이나 호롱불과 같이 낮은 조도의 실내를 조금 더 밝게 하려는 의도가 있기도 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오래된 책을 이용한 문자가 씌여 있는 종이, 자연 상태 그대로의 꽃이나 풀을 눌러서 말린 압화를 한지와 한지 사이에 넣어 만든 종이 등으로 벽을 마무리하기도 하였습니다.
실내 공간의 바닥에 쓰는 장판지는 한지를 여러 겹으로 겹치고 마감으로 콩기름이나 들기름을 먹여 윤이 나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광택이 있으면서도 매끄러운 표면을 지녔는데 기름칠을 하는 수에 비례해 원하는 색을 만들 수 있었고, 창호지나 도배지에 비해 무게감 있는 색상으로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한지는 섬유 사이에 무수한 구멍이 있으면서도 적당한 공간을 가지고 있어서 보온성이 뛰어납니다. 옛날에는 날씨가 추워지면 과거 우리 선비들은 읽고 난 책들을 모아 함경도나 평안도 지방의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보내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 책장을 뜯어 속옷을 지어 입거나 솜 대신 옷 속에 누벼서 조금이나마 추위를 면해보라는 온정이 가득한 선물이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섬유가 귀하던 시절에는 이 종이 옷을 변방의 병졸들이 방한복 대용으로 입었다 해서 주지의(收紙衣)라 불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또한 종이신은 미투리 또는 지혜(紙鞋)라 하여 종이를 갸름하게 자른 다음 노끈으로 꼬아 만들었는데 당시 장안의 최고 멋쟁이로 통하던 양반들에게 인기를 끌만큼 그 맵시가 으뜸이었습니다. 조선의 19대 임금인 숙정 9년에는 양반들이 종이신을 신는 것을 멋으로 알고 시중에 신고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를 만들어 파는 자들이 많았고, 사대부 집들에는 책 도둑이 극성이라 하니 철저히 단속하라는 어명이 내려졌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한지와 함께 해왔습니다. 처음 아기의 출생을 알리기 위해 대문에 거는 금줄에 숯, 고추 등과 함께 한지를 꽂았으며 아기의 백일을 축하하기 위해 백설기 떡을 만들 때도 시루 밑바닥에 한지를 깔았습니다. 글을 배우게 되면 한지로 만든 서책을 접하게 되고 또한 한지로 만든 연을 날렸으며 닥나무 껍질로 줄을 만들어 팽이를 치며 놀았습니다. 결혼할 때는 한지 혼서(婚書)에 사주를 적어 가정을 일구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운명이 다하면 한지로 염을 했고 장례 행렬에서 만장(輓章_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을 쓴 깃발)을 뒤로 하고 한지 지전(돈 모양의 종이)을 뿌렸습니다.
사주단자 및 혼서지 : 사주단자는 혼인이 정해진 뒤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신랑의 사주를 적어 보내는 종이이고 혼서지는 혼인할 때 신랑 집에서 예단과 함께 신부 집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옷본 : 시집갈 때 여성들은 한지로 만든 옷본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외에도 책이나 불경을 제작하거나 다양한 공예작품을 만들고 실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용품들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한지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이러한 한지가 현재는 양지에 밀려 점점 그 사용이 줄어들고 있다고 하네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지의 오랜 보존성과 독특한 질감 등의 장점을 살려 현대화 ․ 대중화하고자하는 전반적인 현황과 한지의 다양한 미래상을 살펴보며 무엇을 고민해야 하고, 어디로 향해 가야하는지 함께 고민해볼까요?
한지는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산량이 많지 않아 상대적으로 비싼 반면 기계로 만들어지는 양지는 대량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합니다. 이러한 열세를 극복하고자 제조 과정에서 대체 원료나 표백제를 사용하거나 고해 시 기계 비터(beater)를 사용하는 등의 변화를 시도하여 종이를 만드는 시간이 단축되고 경비는 절약되었지만, 전통 방식의 보존과 계승에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정책적으로 한지문화 산업특구 지정을 위한 닥나무 재배단지 조성으로 2011년도 이후로 닥나무의 생산량이 소폭 증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관리가 소홀하여 나무가 많이 죽어 생산량이 감소하였고 부족한 닥섬유를 닥펄프의 형태로 태국, 중국, 베트남, 라오스 등에서 수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국내 대표적인 닥나무 생산지는 안동,경주 등 인데 국산닥의 경우 고문헌을 복원할 때나 고가의 주문형 수록지를 만들 때 소요되고, 산업용 한지의 경우에는 태국닥을 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007년 정부의 전통문화에 대한 전략적 지원사업인 ‘한스타일 육성사업’으로 한지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보존이나 복원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우리 고유문화가 현대적으로 재조명되면서 한지산업의 현대화와 국제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최근에는 환경과 지속가능성을 고려한 소비자 라이프 스타일이 대두되면서 건축 인테리어 소재 영역으로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반 분야에서 포장용(과수 포장용지, 쌀 농사용 멀창지 등), 의료용(향균지, 생리대, 기저귀, 반창고 등), 기계부품용(필터지, 절연지, 콘덴서지, 가스켓 등), 섬유의류용(한지사, 양말, 내의, 침구류, 여성정장, 와이셔츠, 골프웨어) 등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 제품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한지 나노섬유, 바이오 한지셔츠, 두루마리 디스플레이, 한지 일회용 휴대폰, 스피커 기능 포함 한지 스크린, 과일 숙성에 따라 변하는 한지 스티커, 바이오 센서, 한지반도체, 인공피부 등의 응용 분야에서 개발 중에 있습니다.
또한 정부에서는 전통 한지제조 기능의 올바른 보존과 전승을 위해 무형문화재 제도를 통해 한지장을 발굴 육성하고 있으며, 한지 품질에 대한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재)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과 한지산업지원센터에서 2013년부터 <한지품질표시제>를 시행하여 한지 산업의 부흥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통문화를 계승하면서 현대적 기술 및 감각과 조화로운 어울림의 지혜를 발휘할 한지의 무궁무진한 변신, 기대되지 않으시나요?
한지품질표시제란 한지에 생산자, 제조방법, 제반 사항(원산지 포함) 등을 표기하여 생산자에게 책임을 강조해 더 좋은 한지를 생산하도록 유도하고 소비자에게 믿음을 주는 제도로서 한지의 제품 인지도 및 신뢰성을 확보하고 한지 보급 활성화를 유도하기 위하여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고 (재)한국공예디자인 문화진흥원과 한지산업지원센터가 시행ㆍ관리하고 있습니다.
한지 품질 표시제는 생산자 및 주원료 원산지(국산, 외국산)를 비롯하여, 보조원료, 증해 방법, 표백방법, 초지방법, 건조방법, 도침, 평량, 규격과 수량, 종류와 용도 등 한지의 품질을 좌우하는 제반 사항을 소비자가 알기 쉽도록 세부적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포장지는 닥섬유량에 따라 국산 닥 100%는 자색, 그 외 국산닥 100% 미만은 청색으로 구분됩니다. 한지품질표시제 마크와 포장지가 부착된 한지제품은 품질표시제 참여 업체에서 직접 구매할 수 있으며, 참여 업체가 거래하고 있는 유통업체(서울 종로구 인사동 판매처 및 전주한지사업협동조합 공동판매장)에서도 구매할 수 있습니다. 한지품질표시제의 시행배경과 절차, 내용 등은 한지품질표시제 웹사이트(www.hanji-q.kr)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자료 출처: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진흥원 뉴스
[국내산 닥함유량에 따른 표시와 색상의 의미]
‘한지품질표시제’에 사용되는 마크와 라벨은 88서울올림픽 호돌이 캐릭터를 개발한 디자인파크 김현 대표의 재능기부로 디자인되었습니다. 마크의 전체적인 형태는 한지를 만드는 틀에서 착안한 형태로 ‘한지를 바로 보는 기준’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ㅎ’자는 ‘한지’와 ‘한국’의 첫소리 글자로 한국 고유의 종이인 한지에 대해 대표성을 가지며, 한글 중에서도 조형적 아름다움이 가장 뛰어난 글자로 의의가 있기에 마크의 핵심요소로 활용하였습니다.
[포장문양 의미]
금문(錦鈫)은 반복직선 모양으로 뇌문이라고도 하고, 연속시킨 무늬를 전개한 기하학 무늬의 하나입니다. 이들은 다 같이 회문의 일종으로 농경신앙에서 비롯된 일종의 풍요를 기원하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